지역복지실천, 100년의 세월을 되돌려 앞으로의 100년을 만드는 일일수도...
복지허브화는 복지에 대한 지금까지와는 다른 개념과 이념을 담고 있다.
이전까지는 복지, 그리고 전달체계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주로 복지정책 혹은 서비스 수혜대상을 늘리거나 물질적 급부를 늘리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늘어나는 욕구를 어떻게, 무엇으로 감당할 것인가의 문제를 총량의 문제로 보았고,
부족한 공공 자원을 어떻게 민간 자원으로 보충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복지허브화는 공동체의 삶,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삶을 구성하는 원리와 시스템을 혁신하는 문제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재화와 자원의 분배를 시장을 통한 경쟁에 맡겨왔던 시스템이 지닌 한계에 대한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주는 자와 받는 자, 제공자와 대상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일방적 이전의 특성을 지닌 현행 시스템의 극복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주민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웃 간의 인간적 친교와 유대에 기초한 공동체의 재건,
그 공동체를 구성할 사회적 원리와 시스템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동안 간과해왔던 이념과 가치, 사회적 신뢰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는 듯 하다.
흔히 우리 나라의 국가복지 수준은 경제발전의 수준과 매우 모순된 구조를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는 낮은 조세부담률로 반증되며,
증세에 대한 사회적, 국민적 거부감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왜 그럴까 하는 질문을 해 보았다.
우리 국민들은 100여 년 동안의 근, 현대사 격동기를 겪으면서
어느 한 순간도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 말, 일본 강점기, 해방 후 격동기와 전쟁, 전후 절대빈곤, 압축적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국민들은 국가를 위해 젊음을, 생명을 바쳤고,
경제적 위기에 봉착해서는 아이들의 돌반지, 결혼반지까지 빼서 내놓았다.
그러나 정치는 언제나 그들끼리의 이전투구와 승리의 잔치로 끝났다.
어린 고등학생의 죽음으로, 대학생의 죽음을 촉발된 민주화의 열망 역시 그렇게 끝났다.
잘 살아보세라고 아침마다 마을회관 확성기를 울려대며 국민들에게 국가를 위한 희생과 봉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산업현장에서는 열심히 일하면 너의 재산이 늘어나고, 경제적 신분이 상승한다는
경쟁적 이념을 심어주고 내면화시켜 왔다.
이는 어쩌면 시장 논리에서 당연하게 여겨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구성원의 공동체 의식과 지속가능한 공동체 보다는
오히려 개인주의를 만연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보니 노동현장에서도 임금격차는 상상할 수 없는 격차로 벌어지고
죽어라 열심히 일 하는데도 빈곤이 계속되는 상황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리고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경제적 기득권을 보호, 유지하기 위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심지어는 임금이 높은 기업 노동현장은 아버지의 일자리를 그 아들에게 우선 주는 협상까지 하면서
같은 근로계층, 노동자 계층의 근로시장 진입을 차단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복지허브화는 우리 나라 근, 현대사 진행과정 속에서
상실되어 버린 공동체, 공동체적 삶의 원리와 시스템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천민 자본주의와 기득권 보호라는 주류집단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배제되었던 국민이 스스로 지속가능한 보호와 안전, 지속가능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가도록
그 역량을 키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난 100여년 동안 잃어버리고 빼앗긴 것을 찾아
앞으로의 100년을 향한 삶을 설계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